Tres Dias SOL

14. 크리스챤의 믿는 바와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시간들이 필요하다. 본문

Vida Nueva 운동

14. 크리스챤의 믿는 바와 삶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경험과 시간들이 필요하다.

금구 2018. 2. 15. 12:03

* 요즘...교회마다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얘기들 중에 하나는 교회학교가 없는 교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문제는 어제오늘만의 일은 아닙니다. 이미 벌써 1990년대부터 우려하고 걱정들 했던 상황들이었습니다. 자라나는 미래세대들을 위해 과감하게 아낌없이 지원하고 관심을 가져왔던 교회들도 있겠으나 그렇지 못한 교회들도 많았으니...오늘날의 이러한 현실이 사실화가 되었다고 해서 그리 놀랄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이를 두고 교회 안팎에서 여러가지 문제와 원인들을 분석한 결과들이 넘쳐 납니다만...그게 교회가 지금 처해 있는 현실에서 당장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대안이 결코 되어주지 못한다는데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저는 현재의 한국 사회 내에서 한국교회를 볼 때 그래도 아직까지는 바닥을 칠 정도로 절망적이지는 않구나 라는 생각을 합니다.




1. "예수가 답이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크리스챤들이 성경을 토대로 내놓는 정답입니다. 너무 뻔하죠. 그런데 정말 궁극적으로 봤을 때 정말 정답맞습니다. 바로 불과 100여년 전에 스페인 사회가 그러했습니다. 로마 가톨릭이 국교인 스페인, 권력층과 교회는 부유한 반면 도시의 노동자들은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의 손을 잡아주고 보살펴야 할 교회가 당시 교회가 가지고 있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권력층을 비호하는 일이 늘어나면서 이들 소외계층으로부터 거센 반발이 일어나 급기야 내전에서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까지 죽임을 당할 정도의 반가톨릭 교회적인 사회분위기가 일부 조성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로 인해 자국민들끼리 첨예하게 대립하고 살상까지 마다하지 않고 벌였던 좌우익간의 수차례의 내전으로 인한 전국의 황폐화, 그리고 서슬 시퍼런 프랑코의 독재로 5인 이상이 모이면 역적모의(?)하는 것인냥 오해 받아 친분 있는 사람들끼리 모여 차조차 마시기 힘들 정도로 숨막혔던 그 시대 그 스페인을 변화시킨 것은 바로 꾸르실료 운동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1-2차 세계대전이 연이어 일어났던 혼란과 격동의 20세기, 그러한 그 시대 그 상황 속에서 스페인의 마요르까라는 섬에 살고 있던 청년들을 통해 밝히 드러낸 사실은 바로 이러한 인간세상에 필요한 것은 돈도, 명예도, 권력도, 쾌락도 아닌 요한복음 3장 16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우리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였다는 아주 단순한 진리의 말씀이었습니다.


프랑코의 독재체제 하에 있던 스페인은 수십년간의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사분오열된 스페인을 하나로 뭉치게 할 필요성이 있던 프랑코 정부의 정책 아래 스페인 가톨릭교회가 이에 부응(?)을 하여 스페인 전국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성 야고보의 무덤"으로 성지순례를 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준비하기 위해 전국 각지의 모든 교구에서 이 순례여행에 청년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고 준비하는 단기과정 모임으로써 "꾸르실료"를 개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러한 국가 정책에 따라 교회의 성지순례 준비모임을 준비하는 가운데 그 누구도 생각지도 못했던 마요르까섬, 하나님은 바로 이 섬에서 성지순례를 준비하기 위해 매주 모였던 젊은이들을 통해 꾸르실료 운동을 태동케 하시고 이 운동을 통해 우리가 항상 마음에 품고 초점 맞춰 살아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그들이 발견한 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진리는 교회 안에서 그들이 모인데서 출발합니다. 꾸르실료를 창시한 초창기 마요르까의 몇몇 젊은이들은 마요르까 섬의 교구 부주교로 부임한지 얼마 안된 후안 에르바스 부주교와 함께 매주 성지순례 준비모임을 하면서 하나님께 미사(예배)드리고, 기도하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교제하면서 나누었습니다. 너무나도 단순한 이 일들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을 영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그들을 준비시키셨고 때가 되자 그들이 준비한 꾸르실료를 통해 이 일을 실행하셨습니다. 이 일은 단숨에 일어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현재 경험하고  있는 꾸르실료는 수년간 여러 번의 꾸르실료 진행을 통해 그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꾸르실료 운동의 하일라이트는 3박4일의 주말인데 이 주말 기간 동안 전해 지는 15개의 로요와 각종 신앙 프로그램들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공통의 주제와 이를 몸소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프로그램들의 정교한 조합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중반 로마 가톨릭교회는 소위 "현대사회 속의 중세교회"로 겉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첨단과학기술의 발달과 좌우익의 이념대립이 심각한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수년간 개최하면서 이 문제에 대한 일종의 결과물을 내었습니다. 요즘, 한국 사회 안에서 개신교를 보면서 지난 백년 전 스페인에서 로마 가톨릭이 마치 오버랩되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우려가 된다는 말이지 결코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현재의 한국교회의 당면한 문제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몰라서 발생했다기 보다는 세속화의 영향이 상당히 크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와 맘몬이라는 두 주인 사이에서 현실이라는 보이지 않는 벽을 극복해 넘을 수 있게 하는 믿음이 언제 어디서부터인지 흔들리기 시작해서 발생한 결과라고 봅니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나 막상 현실 앞에서 주저하고 머뭇거리고 있는 크리스챤들이 많다고 봅니다. 물론 그 사람들 중에서 나 자신도 한명이라고 볼 수 있겠지요.


많은 목회자들이 1980년대 성경공부, 1990년대 제자훈련, 2000년대 신사도운동과 더불어 G12에 열광했습니다. 물론 괄목할 만한 성과들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부정하지 않고 그들을 결코 비난이나 어떤 비판도 할 의도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그러한 흐름에서 주도적으로 괄목하게 성장한 교회는 극소수라는 점입니다. 많은 교회들이 그렇게 대형교회로 성장한 교회들을 보면서 부러워 했고, 그 교회의 목회자들이 성장의 비결이라고 말했던 바를 그대로 따라했지만 그 결과들은 미비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지금에 와서는 한때의 유행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을 많이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한 때의 유행이었다는 신앙운동 중에 하나가 바로 "Three Days Movement"로써 꾸르실료, 트레스 디아스, T.E.C, 비다누에바 운동들입니다. 물론 이들도 현재 여러가지 문제에 당면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프로그램 자체의 문제라기 보다는 요즘 같은 먹고 살기 힘든 시대에 4일 연속으로 삶의 터전을 비운다는게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단들의 난립으로 교회 밖에서 실시되는 이런 신앙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보내는 것에 난색을 표하기도 하고, 지원자 한 사람을 후원하는데 드는 비용도 상당히 비싼 것도 사실입니다. 공부와 입시, 취업을 앞두고 있는 젊은이들에게도 결코 쉽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유사한 프로그램들이 현재 한국 내에서 약 100여개 넘게 난립하여 운영되고 있다고 보니 더 이상 새로운 참가자들을 찾는게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들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프로그램에 다녀온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들 말합니다. "왜 저는 이제야 이것을 경험했을까요? 왜 좀 더 일찍 참여하지 못했을까요? 그게 정말 후회가 돼요."


왜 그럴까? 교회에서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하셨던 분들, 또는 교회에서 그렇게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에 참가해 보라고 권유했는데 그때는 하지 않았던 분들이 이 프로그램에 다녀와서는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일까?


여기에서 한 가지 우리가 살펴 봐야 되는 것이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는 교회가 틀리거나 잘못됐다는게 결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가 잠시 잊고 있는바가 무엇인가 한번 되짚어 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순복음의 문제입니다. 특정 교단을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고 우리가 믿고 전해 온 복음의 진정한 가치와 능력이 어떠한지 성도들의 삶 속에서 순전히 체험하지 못한데서 오는 문제에서 기인하지 않는가 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신유, 예언, 방언 등의 다양한 이적들을 체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리스챤 삶의 고귀함과 아름다움, 비전과 능력의 문제입니다. 크리스챤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신자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본질적인 삶의 나눔 문제인 것입니다.


꾸르실료 운동과 그로부터 파생된 운동들은 그 가장 본질적인 예수중심, 그의 몸된 교회중심의 삶, 그 기본을 말씀과 삶으로 증거하는데서 그 강점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심플합니다. 바로 교회가 이 점에 주목해야 된다고 봅니다. 이 점을 주시하고 적용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챤 생활의 단기과정으로써의 꾸르실료와 트레스 디아스, T.E.C와 비다누에바 운동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생활하여 사실로 들어난 진리를 함께 나누는 크리스챤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하나의 운동"이라고 늘 얘기해 왔습니다. 이 운동은 크리스챤 공동체의 본체인 교회의 중추를 세우고 세상을 그리스도화시킬 수 있는 크리스챤 리더를 발굴하고 훈련시켜 세상으로 파송하는 교회의 "하나의 운동"입니다.


우리 평신도들에게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살기 위해 크리스챤의 믿는 바와 삶을 함께 공유할수 있는 경험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현대 세계 속에서 교회가 바르고 든든하게 서가는데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조화롭게 이뤄가길 소망합니다.


이러한 그리스도 교회의 귀중한 신앙을 우리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경험해 볼 수 있는 장을 교회가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2천년동안 지키고 가르치고 믿어 전한 바의 핵심 내용과 그 이유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해 주어야 합니다.


1965년에 위에서 언급했던 이러한 고민들을 미국의 가톨릭교회 성직자와 신자들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여서 기도하고, 준비하고, 후원하여 실행했을 때 젊은이들이 변화되었습니다. 젊은이들과 시선을 맞추고 그들의 문화에 계시의 옷을 입혀 그리스도와 만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요즘의 교회들이 이 T.E.C를 연구해서 각자 교단과 지교회에 과감히 적용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단지 일시적으로 이 프로그램만을 이용하려고 하지 말구요. 천주교 수원교구에서 오리지날 비다누에바 프로그램이 아닌 이름만 비다누에바이고 오리지날과는 전혀 다른 미8군의 개신교 비다누에바 자료들을 가져다가 연구해서 실시한 결과 한국 천주교의 여러교구로 이 비다누에바 프로그램이 확산되었고 천주교의 청년들이 다시 신앙생활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을 주목했으면 좋겠습니다.


비다누에바는 결코 쉬운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대충 준비해서 진행하면 100%로 실패하는 프로그램입니다. 교회의 전폭적인 지원과 관심이 없으면 결코 개최하지도 버틸 수도 없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관심을 가지고 지원을 하면 아주 유익하고 효과적인 프로그램이라 자신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꼭 비다누에바가 아니어도 교회 내에서 실시하고 있는 여러가지 프로그램들을 통해 크리스챤 공동체의 신앙을 청소년들이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청소년들과 청년들은 투자의 대상으로 보지 마시고 품어야될 우리의 자녀, 하나님의 귀한 자녀로 봐 주십시오.